마태복음 18장 1-14절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1)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2)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3)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4)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5)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6)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7)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8)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9)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10)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12)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13)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14)
본 구절은 참으로 보화와 같은 구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짧다면 짧은 구절들 안에 정말 중요한 영적 보화들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고 질문을 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참 제자들다운 질문입니다. 그 당시 제자들은 어떤 상황이었냐면, 예수님께서 이미 그들에게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 후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두 차례나 말씀해 주신 직후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을 면전에서 반박하거나 매우 근심하는 반응을 보이는게 전부였고 진지하게 그 말씀을 받아 들이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 당장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고 자신들은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될거라는 큰 야망을 품었습니다. 그리곤 서로 누가 더 큰 자인지 논쟁을 하곤 했습니다. 물론 이 제자들은 나중에 성령을 받고 정말 존경할만하고 본받을 만한 위대한 예수님의 열 두 사도로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하곤 말이죠.
이들에겐 예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과 믿음이 있었지만, 아직 예수님과 형제 자매들을 향한 사랑보다도 자신의 입지와 안위에 더 큰 관심을 보이는 다소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그들이 던진 질문에 대한 맞춤 답을 주시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질문과는 약간 안 맞는 답변처럼 보이지만, 예수님께선 핵심을 짚어 주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선 제자들 가운데 어린 아이 한 명을 세우십니다. 그리곤 그들에게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이어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라고 답을 주십니다. 그들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주심과 동시에 그들이 현 시점에서 초점을 맞춰 직시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것보다 중요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왜 이러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왜냐하면 이미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가능성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이게 좀 충격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만 사실입니다. 제자들에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선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하는 제자들의 질문에 이와 같이 답변하셨던 것입니다. 그 뜻을 재해석하면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 곳에서 큰 자가 되는 것은 이차적인 요소이다. 먼저 천국에 들어가야 그곳에서 큰 자가 되는 것에 대해 논할 수 있다.” 그렇습니다.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것도, 이 땅에서 큰 자가 되는 것도 그 어떠한 것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앞설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그 이후에야 논의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게 본 구절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지난 글 '회개의 터 1. 믿음'에서 회개란 ‘돌이키는 것’이라고 설명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죄에서 출발하여 종착점은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지난 설명에서 우리의 출발점과 종착점을 설명드렸다면 오늘 말씀에서는 그 길에서의 우리의 모습에 대해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우리가 죄를 떠나 하나님께로 갈 때에 우리의 모습 혹은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예수님께선 우리가 어린 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어린 아이일까요? 이것은 우리가 어리숙한 모습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로 하신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가 작고 약하기 때문에 부모님에게 의지하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힘과 능력과 지혜와 지식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를 낮추어 주님께 모든 부분에서 믿고 의지하라는 의미로 주신 말씀입니다. 이걸 한 단어로 바꾸어 말하면 겸손입니다. 4절에서 예수님께선 어린 아이에 대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라고 설명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어린 아이와 같이 되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겸손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와 겸손의 상관관계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 즉 도우심이 있어야만 의에 이를 수 있고 의로움을 덧입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은혜를 받는 비결이 다름 아닌 겸손입니다. 이 진리는 구약과 신약 전반에 걸쳐 명확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뜻입니다. 잠언은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3:34)라고 말하고 있고, 야고보서는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4:6)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또한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5;5)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구원을 받고자 한다면 겸손해야만 합니다. 만일 우리가 겸손하지 않다면 다시 말해 우리가 우리의 힘과 능력 지혜와 지식을 하나님의 그것보다 더 믿고 의지한다면 우리는 죄를 떠나지도 않을 것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회개해야 할 것은 죄보다도 먼저 우리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구원의 여정 가운데 때에 따라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를 지속적으로 받음으로 능히 어떠한 역경과 유혹도 끝내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믿습니까? 겸손의 자세는 구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선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회개해야 할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선 이어서 우리가 회개해야 할 이유를 알려주시며 여러 진리가 담긴 말씀을 주십니다. 5절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5)라고 하시는데, 여기서 영접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환영하여 들이다라는 뜻입니다. 만일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을 믿는 자를 환영하여 영접하는 등 선을 행한다면 그 행위가 바로 주님께 한 행위가 된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어서 하시는 말씀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6절“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정말 무서운 말씀이죠.
여기서 ‘실족하게 하다’라는 것은 ‘넘어지게 하다’ 혹은 ‘죄를 짓게 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문맥을 본다면 예수님께서 14절에서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라고 하신 것을 참고할 때 실족하다라는 것은 ‘잃은 자가 되는 것’, 즉 구원을 잃은 자가 되는 것과 동의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연자 맷돌이란 가정에서 쓰던 일반적인 맷돌이 아니라, 소나 나귀와 같은 가축의 힘을 이용하여 돌리는 대형 맷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대형 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빠뜨려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사형선고를 의미합니다. 실제로 당시 로마법에는 사회를 혼란케 한 자나 도덕적으로 문란한 중범죄자에게 이러한 극형으로 처벌하는 제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무서운 형벌을 말씀하시면서 “누구든지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연자 맷돌이 목에 달려 희망도 없이 바다 깊은 곳으로 가라 앉게 되는 공포스럽고 끔찍한 사형이 더 낫다니, 주님께선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실족하게 하는 사람에게 있을 화가 연자 맷돌이 목에 달려 깊은 바다 속에 가라 앉는 것보다 더 끔찍하고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선 7절에서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라고 하시면서, 8절과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8절)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9절)”
여러분 이 말씀을 이해하십니까? 반드시 이해하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선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다고 하시며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고 하십니다. 그리곤 손이나 발, 그리고 눈이 범죄하게 하거든 차라리 찍어 내버리거나 빼어 내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두 손과 발, 그리고 두 눈으로 영원한 불,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를 실족하게 하는 일이란 바로 우리의 손과 발, 눈 등으로 죄를 짓는 것을 의미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우리가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다른 믿는 이가 그 죄의 피해자가 됨으로써 혹은 그 죄를 보고 따라함으로써 믿음에서 떠나 잃은 자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런 죄를 지은 자에게는 화가 있는데, 그 화란 바로 영원한 불, 지옥 불에 던져지게 되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왜 형제 자매들을 사랑해야 하는가? 우리는 옆의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가? 왜 우리는 죄를 지어선 안 되는가?에 대한 명확한 답을 주시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짐으로써 옆의 믿는 사람이 실족하여 하나님을 떠나 구원을 잃어버린 길 잃은 양이 된다면 우리에겐 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고집스럽게 그러한 삶을 계속 선택해 나간다면 안타깝지만 우리가 최종적으로 도착하게 될 곳은 영원한 생명의 장소가 아니라 영원한 불의 장소가 될 것입니다. 그곳은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장소입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 모두는 절대로 그곳에 가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선 바로 그 목적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오늘 이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너희가 너희 자신의 안위만, 너 자신만의 입지만을 위해서 형제 자매들에게 죄를 짓게 되어 그들이 실족하게 된다면 너희에게 피할 수 없는 화가 있다. 차라리 그렇게 되느니 너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손과 발과 눈을 빼어 내버리는 것이 나을 정도로 지옥 불은 처참하다. 그러니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아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뵙고 있다.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아니, 이렇게 말씀 하실 수 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그리고 예수님께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여러분 한 명 한 명, 믿는 자들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평생을, 아니 영원이라는 시간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12-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12)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13)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14)”
인간의 감정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기쁨 슬픔 분노 이러한 감정을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하나님께선 감정을 가지고 계십니다. 어쩌면 우리보다도 더 감정을 느끼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느끼시는 가장 큰 슬픔은 믿는 자 한 명이 잃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을 얻은 자 열 명, 백 명이 주는 기쁨보다도 더 큰 슬픔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가장 큰 기쁨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잃은 자 한 명을 다시 되찾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믿어 구원을 얻은 자가 주는 기쁨보다도 훨씬 큰 기쁨인 것입니다. 우리는 “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라고 찬양을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잃은 자가 되지 않음과 동시에 잃은 자가 있다면 그들이 다시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은 하늘 보좌도 버리고 세상 죄를 지셨으며 죽으실 것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또한 그분이 사역하신 3년이란 시간 모두 이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미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을 손수 지심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 진정으로 의로운 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여시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 회개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옆에 사랑하는 이들의 영혼을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끝으로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4절에 보면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라고 하십니다.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뜻이 아닌데, 이 뜻이 이루어지고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한 번 믿으면 영원히 구원을 잃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한 번 구원을 받으면 그 구원이 취소되지 않으며 어떻게 해서든지 천국에 들어갈 거라고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그런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말씀을 듣고 함께 나눈 성경을 잘 살펴보면서 이 부분에 대한 생각을 다시 잘 정리해 보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예수님께선 분명히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앞서 읽었던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라는 구절입니다. 앞서 설명드렸듯이 여기서 실족하게 하는 일이란 믿는 자가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문맥에 의해서도 드러나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의거해 믿는 자들이 믿음을 잃어버려 구원을 잃게 되는 일이 없을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한 마디로 구원은 잃어버릴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이 진리를 가려버리고 파내려 했던 사탄의 계략이 여러 차례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일에 사탄의 쓰임을 받은 이들이 교회사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이러한 명백한 말씀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사람이 만들어낸 교리와 가르침을 더 따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실족하는 일이 없을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한 번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그 구원이 어떠한 위험도 없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죄 짓기를 고집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조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물론이고 다른 이의 구원까지도 빼앗아 버릴 수 있는 위험이 여전히 이 세상에는 존재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라고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서 밝힌 것입니다. 이 주제에 관련해서는 추후에 기회가 된다면 더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하나님의 뜻에 대해 말씀드리면, 예수님께선 작은 자 중 하나라도 잃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닌데 그 뜻이 이 땅에선 이루어 지지 않고 있다라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주기도문으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시작되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9)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10)” 10절 끝부분을 보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를 합니다. 이 기도는 다들 아시다시피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아직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 지지 않았기 때문에 드릴 필요가 있는 기도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여기서 하나님의 뜻이라는 단어에 담긴 핵심적인 사항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것이 우리의 구원과 관련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은 크십니다. 한 가지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구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그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이 땅에서의 사명을 다하고 세상을 떠난 성도들은 하늘 나라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들의 구원은 더 이상 빼앗길 수도 잃어버릴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읽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구원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이 땅에선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기도문을 통하여 성도 한 명 한 명이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래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신다면 그 때에는 이 땅에 사는 성도들의 몸도 예수님께서 부활의 몸을 입으신 것처럼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는 더 이상 구원을 잃어버릴 위험이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저는 예수님의 기도에 이 진리가 핵심적으로 담겨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이 속히 오도록 기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모두 구원에 이르고 그 구원을 잃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을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 구원을 우리가 잃지 않기 위해선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서 어린 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
또한 죄를 짓지 않음으로 자신의 영혼도 보호하고 옆의 형제 자매들의 영혼 또한 보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연자 맷돌에 목이 달려 깊은 바다 속에 빠지는 것이 더 낫게 여겨지는 지옥 불에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손이나 발 그리고 눈이 죄를 짓게 만든다면 차라리 그것을 제거해 버리고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발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백배 천배 만배는 더 낫습니다.
슬프게도 예수님의 말씀처럼 세상에는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계속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노력해야 합니다.
함께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주님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기쁨 성도들을 위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주님께 드리게 하여주옵소서. 죄를 짓는 것을 멈추게 하여주시고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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