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을 통해 교회의 터가 무엇이며 왜 중요한지에 대해 성경적으로 입증하고 그 첫번째에 해당하는 회개에 대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터라는 것은 여러분들도 잘 아시듯 건물을 세워야 할 자리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어떤 건물이 되었든지 간에 건물을 세우고자 한다면 먼저 그 터를 제대로 닦기 위해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입니다. 왜냐하면 그 터가 견고하게 잘 닦여 있어야만 그 위에 세워질 건물도 견고하게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터가 제대로 닦여 있지 않다면 그 위에 건물이 제대로 설 수 없음은 물론이고 세워지더라도 폭우나 지진과 같은 재해에 취약해져 결국 무너져 내릴 위험이 큽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침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저는 여러분들이 이 구절을 그 전에 알고 계셨는지, 혹은 알고 계셨다면 얼마나 큰 관심을 갖고 계셨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에 이 구절을 발견했을 때 정말 귀중한 보물을 발견했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은 여러 해가 지난 지금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바로 교회의 터에 대해서 잘 설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버리고’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 버린다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다’ 혹은 ‘딛고 일어서다’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뒤이어서 히브리서 저자는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침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을 언급하며 이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들은 같은 것을 두 번에 걸쳐 표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먼저 언급한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와 뒤이어 나온 ‘죽은 행실을 회개함’, ‘하나님께 대한 신앙’, ‘침례들’, ‘안수’, ‘죽은 자의 부활’, ‘영원한 심판’, 이 여섯 가지 교훈이 같은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사실은 문맥을 주의 깊게 살펴 보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이 구절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교회의 터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 도의 초보 즉 기초라고 할 수 있는 것들에는 무엇이 있는지 명확하게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는 가장 기초적인 진리 여섯 가지가 바로 이것들이라는 것이고, 누군가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고자 할 때 반드시 가르쳐 져야 할 기본적인 진리가 바로 이 여섯 가지이며 누군가가 기독교인이 되고자 할 때 우리가 가르쳐 줄 수 있어야 할 최소한의 것이 바로 이 여섯 가지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영국의 복음주의 지도자 중 한 명인 톰 라이트(Tom Wright)는 이와 관련해서 이렇게 썼습니다.
“이 대목에서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한 번 깜짝 놀라 눈을 부빌 것이다. 이런 내용이… 기본이라고? 원래 초기 기독교의 ABC라고? 우리 회중들은 대부분 그런 내용에 대해 많이 모른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많은 사람들은 ‘죽은 행위’가 무엇이고 왜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지는 고사하고, 왜 우리가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는지, 부활이 정확하게 무엇이고 왜 우리가 부활을 믿어야 하는지 당신에게 말해 줄 수도 없다. 만약 이것이 기독교적 소양의 기초, 즉 ABC라면 초등학교로 돌아가야 할 그리스도인 개인과 교회가 많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내 생각에 그들은 오래전에 알파벳을 배워 잊은 게 아니다. 그들은 애당초 알파벳을 배우지도 않았다. 그들은 영적 옹알이와 손짓에 해당하는 것에 기대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모든 사람을 위한 히브리서」, IVP, p.86)
저는 톰 라이트의 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의 기초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제대로 알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기독교 신앙의 첫 걸음이 회개로 시작하여 신앙과 침례들, 안수, 부활과 심판으로 나아가는 것이 기독교의 어떤 높은 수준의 이야기가 아닌 가장 기초적인 진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알고 계셨다면 오늘의 본문 말씀처럼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데에 집중하시면 되지만, 만일 알지 못하셨다면 지금이라도 늦은 것이 아니니 마음 속에 확실하게 새기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 첫번째 걸음인 죽은 행실을 회개함이란 무엇인지부터 설명 드리고자 합니다. 죽은 행실에 대해선 조금 뒤에서 설명 드리고, 먼저 회개가 무엇인지부터 설명 드리겠습니다. 회개란 ‘돌아오다’ 혹은 ‘회심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마음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출발점과 도착점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죽은 행실을 회개함이기 때문에 출발점은 죽은 행실이 되고 도착점은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그렇다면 회개를 해야 할 필요성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부활과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이란 죽은 자의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하고 심판이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준비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마귀와 그를 따르던 천사들을 위해 준비하신 불못에 사람들의 행위대로 심판하셔서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부활과 심판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회개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부활과 심판이라는 놀랍고 엄중한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가 없다면 사람은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행하지 못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이건 학교에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라는 시험제도가 없다면 학생들이 시험이 있을 때와 비교해 덜 공부할 가능성이 높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부활과 심판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회개를 해야만 합니다. 만일 우리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회개는 죽은 행실을 대해서 행해져야 하는 회개가 되어야 합니다.
죽은 행실들에 대해서 잘 설명한 성경 구절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 9-11절입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9)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10)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11)“
이 말씀이 잘 보여주듯이 음행, 우상 숭배, 간음, 탐색, 남색, 도적, 탐욕, 술 취함, 모욕, 속여 빼앗음이라는 죄를 짓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의미가 되기에 결과적으로 불못에 가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중간지대는 없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죽은 행실들입니다. 종류가 상당히 다양하고 많죠. 음행, 우상 숭배, 간음, 탐색, 남색, 도적, 탐욕, 술취함, 모욕, 속여 빼앗음. 그런데 이러한 죄들을 단순히 우리의 몸이 짓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죄를 짓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7장 28절에서 예수님께선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남성이나 여성이나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음행 혹은 간음을 위시한 여러 죄악들을 생각할 때 우리는 단순히 몸으로 짓는 죄만 죽은 행실이다라는 인식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선 우리의 마음을 보시기 때문에 우리가 몸으로 죄를 짓기 전에 이미 우리 마음으로 지은 죄를 보시고 죄로 확정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우상 숭배에 대해서 단순히 금신상과 같은 가짜 신에게 절하고 제사를 드리는 등의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상 숭배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우상 숭배는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상 숭배의 근원에는 이 땅에서의 부귀영화가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골로새서 3장 5절에서 바울을 통해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탐심은 우상 숭배입니다. 탐심이란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선 당연히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돈이 필요하기에 돈을 벌며 돈을 사용하고 또한 다른 이들에게 돈을 나눠주는 삶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만 돈을 많이 벌고자 하며 돈을 사랑하는 것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돈을 사랑하는 마음은 우리에게 있어서 경계해야 할 1순위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경고하며 돈을 탐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다고(딤전 6:10) 경고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동성애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마다 자신의 성향이 있고 기호가 있기에 자기들이 원해서 행하는 것이라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괜찮다라는 인본주의적인 관점에서 동성애를 합리화하고 포용합니다. 그러나 본 구절에 나와있는 남색이라는 것은 동성애를 뜻합니다. 즉 동성애를 가지고 남색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이유입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하나님께선 동성애를 죄로 규정하시고 과거로부터 금하셨습니다. 그리고 신약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신 규범인 신약 성경에도 여전히 동성애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죄라는 것을 명시적으로 바울을 통해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술 취함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 중에 술을 좋아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주의해서 잘 들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술을 좋아하고 마신다고 해서 죄가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술에 한 번 취한 적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술 취함이란 말 그대로 자기를 제어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서까지 술을 마심으로 취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모든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보시는 기준은 습관화된 죄이기에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정리하자면 술을 마시는 행위 자체가 죄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제어 능력을 잃을 때까지 마시는 행위의 반복성이 죄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술을 좋아하시는 분들께서는 이 점을 잊지 마셔서 술을 마시더라도 조심히 그리고 되도록이면 건강에 좋지도 않은 술을 필요에 따라서 가끔 마시는 것을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만일 이 점에서 절제가 안 되는 분이시라면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술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 편이 좋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대략적으로 설명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죄들에 대한 설명을 드렸다고 생각이 듭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한 군데에서만 고린도전서 6장 9-11절과 같은 구절을 소개해 드리면 “아 이게 그런 뜻이 아니다”라고 하실 수 있을 것 같아 한 군데 더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에베소서 5장 19-21절 말씀입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19)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20)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21)”
고린도전서 말씀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대동소이합니다. 그 얘기는 이 말씀이 명확하게 바로 그 뜻을 전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 이런 죄를 짓고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엄중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를 하여 이런 죄에서 돌이켜 마음을 바꿔 하나님께 하나님의 말씀에 돌아가야 합니다.
이 회개가 얼마나 중요한지 예수님의 사역, 그 자체가 회개의 선포로 시작합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친척인 침례 요한이 등장합니다. 침례 요한이 사역을 하면서 외쳤던 한 마디가 뭐였는 줄 아십니까? 바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 였습니다. 천국이란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바로 회개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침례 요한만 이렇게 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주되시고 구주되신 예수님께서 침례 요한이 닦은 사역의 길을 본격적으로 걸어가시면서 그 시작점에 똑같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4장 17절)라고 외치셨습니다. 회개는 선택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어중간한 진리가 아닙니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필수적인 진리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침례 요한의 외침처럼, 예수님의 외침처럼 회개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하나님의 백성의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자 지속적인 상태여야만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간다는 진리를 들고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어떤 죄를 짓던 간에 천국에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한 그 천국 티켓이 무슨 죄를 짓든 취소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너무나도 안타깝고 슬픈 상황입니다. 그 사람들이 어떠한 믿음을 갖고 있던 간에 성경 말씀은 그대로 이뤄어 집니다. 앞서 증명해 드린대로 죄가 습관화되어 고착화 된 사람은 저나 여러분들이나 제 아무리 유명한 역사적 신앙 위인이든지 간에 다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것은 확고부동한 진리입니다.
이런 사람은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본 이해부터 올바로 서 있지 않기 때문에 엄청난 그리고 치명적인 오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선 “믿어라”라고만 외치신 것이 아니라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가르치셨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행 26:20)고 전하며 전도와 선교를 했습니다. 믿음에 대해선 더 자세하게 다음 글에서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여러분들에게 전달드리고자 하는 것은 회개의 위치입니다. 회개는 초반에 말씀드린대로 교회의 기초가 되는 터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첫번째에 위치한 기초석입니다. 단순히 히브리서에서 첫번째에 언급하고 있다고 해서 첫번째 기초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침레 요한의 외침과 예수님의 가르침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인 사도들의 전도를 통해서도 숱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회개를 통해 영적 죽음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돌아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이 되고 후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회개만을 가지고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순 없습니다. 회개와 더불어 올바른 믿음을 가져야만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믿음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글을 어떻게 읽으셨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회개에 대한 가르침은 그 어떤 가르침보다 중요하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에 대해서 안다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것만큼 안타까운 것도 없습니다. 회개에 대해서 올바로 안다면 그것을 실천해야만 말씀에는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 모두 회개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진정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죄를 아예 짓지 않고 살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거듭난 성도라 할지라도 죄된 본성이 육신에 아직 남아 있고 세속적인 세상에 발을 담고 살아가기 때문에 아무리 우리가 한 번 샤워를 해서 깨끗해 졌다 할지라도 살다보면 다시 발이 더러워 지기도 하고 더 많이 더려워 지기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부분을 하나님께 돌이키는 회개는 단회적일 수 있어도 부분적으로 짓는 죄에 대한 회개는 지속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모두 그러한 거룩하고 정결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부족함이 없는 성도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 영역